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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맛의 시대, 우리는 무엇을 살 것인가

규리네 2026. 5. 29. 08:47

<같은 맛의 시대, 우리는 무엇을 살 것인가>

 

장인이 여러 날에 걸쳐 술을 만든다.

 

쌀을 고르고, 누룩을 살피고, 온도를 맞추고, 발효 상태를 확인한다.

냄새를 맡고, 기다리고, 실패하고, 다시 만든다.

 

그렇게 오랜 과정을 거쳐 한 병의 술이 나온다.

 

그런데 어느 날 기술이 발전해서,

그 술과 화학적으로 거의 똑같은 술을 아주 간단하게 만들 수 있게 되었다고 해보자.

 

맛도 같다.

향도 같다.

마셨을 때의 느낌도 같다.

 

그렇다면 우리는 굳이 비싼 돈을 주고 장인이 만든 술을 사야 할까?


1. 결과가 같다면, 개인은 선택할 수 있다

 

사는 사람 입장에서는 단순할 수 있다.

 

맛이 같다면 같은 술 아닌가?

기능이 같다면 같은 물건 아닌가?

감동이 같다면 같은 작품 아닌가?

 

술만의 이야기도 아니다.

 

명품 가방도 그렇다.

그림도 그렇다.

글도 그렇다.

 

AI가 만든 이미지와 문장도 결국 이 질문 앞에 서게 된다.

 

결과물이 충분히 좋고, 내가 느끼는 만족이 같다면,

소비자는 더 싸고 접근 쉬운 쪽을 선택할 수 있다.

 

그것이 반드시 나쁜 일은 아니다.

 

모든 사람이 원본을 사야 하는 것도 아니고,

모든 사람이 장인의 시간을 함께 사야 하는 것도 아니다.

어떤 사람은 맛만 원하고, 어떤 사람은 기능만 원하고, 어떤 사람은 결과만 원한다.

 

개인에게는 그럴 자유가 있다.


2. 그러나, 사회 전체가 과정에 값을 매기지 않는다면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개인은 취향대로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사회 전체가 계속해서

"결과만 같으면 된다"고 말하기 시작하면 어떻게 될까?

 

느리게 술을 빚는 사람은 사라질 수 있다.

전통 방식으로 붓을 만드는 사람도 사라질 수 있다.

가죽을 다루는 사람도, 그림을 배우는 사람도,

문장을 오래 붙들고 씨름하는 사람도 줄어들 수 있다.

 

그 과정은 단순한 취미가 아니다.

 

오랜 시간 쌓인 감각이고, 실패의 기록이고, 몸으로 이어진 지식이다.

누군가가 계속 걸어야만 남는 길이다.

 

그 길을 걷는 사람이 사라지면,

언젠가는 복제할 원본도 사라진다.

기준도 사라진다.

깊이도 사라진다.

 

결과는 남아 있는 것처럼 보여도,

그 결과를 낳는 생태계는 말라갈 수 있다.

 

결과가 같아지는 시대일수록,

과정은 더 이상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생태계의 문제가 된다.


3. 강요로는 지킬 수 없다

 

그렇다고 사람들에게 무조건 비싼 것을 사라고 할 수는 없다.

 

"장인이 만들었으니 사야 한다."

"인간이 만들었으니 더 가치 있다."

"전통이니까 지켜야 한다."

 

이러한 말만으로는 부족하다.

 

사람은 모르는 것을 사랑하기 어렵다.

과정을 본 적 없는 사람에게 과정의 가치를 강요할 수는 없다.

 

술이 그냥 병에 담긴 액체로만 보이면, 싼 술이 이긴다.

가방이 그냥 물건을 넣는 도구로만 보이면, 대체품이 이긴다.

그림이 그냥 예쁜 끄적임으로만 보이면, 빠르고 싼 이미지가 이긴다.

 

그러므로, 필요한 것은 강요가 아니라 '입구'다.


4. 과정과 마주칠 수 있는 문

 

어떤 사람들은 무언가를 좋아하면 그 주변까지 파고든다.

 

술을 좋아하다가 누룩을 찾아보고,

그림을 좋아하다가 붓 만드는 과정을 보고,

책을 좋아하다가 종이와 활자와 편집의 세계까지 들어간다.

 

그렇게, 결과물 뒤에 있던 과정이 하나의 세계로 열린다.

 

하지만 모두가 처음부터 그렇게 깊이 들어가지는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먼저 문이 필요하다.

 

이런 것을 만드는 사람이 있다는 것.

이런 과정이 있다는 것.

이 물건 뒤에 이런 시간이 있다는 것.

 

그 사실을 알 수 있는 문이 열려 있어야 한다.

 

학교, 영상, 전시, 체험 공간, 작업실 공개, 커뮤니티 등.

사람들이 우연히라도 그 과정과 마주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누군가는 거기서 멈춘다.

 

"어? 이거 재밌는데?"

 

그 한 사람이 팬이 되고, 후원자가 되고, 배우는 사람이 되고,

어쩌면 다음 장인이 될 수도 있다.


5. 앞으로 우리는 무엇을 살 것인가

 

기술은 앞으로 더 많은 결과를 복제할 것이다.

 

같은 맛.

같은 향.

같은 질감.

같은 그림체.

같은 문장감.

 

어쩌면 많은 영역에서 결과의 차이는 점점 작아질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진짜인가, 가짜인가"하는 질문만으로는 부족하다.

앞으로의 질문은 이것이 될 것이다.

 

"우리는 무엇에 값을 지불할 것인가."

 

결과인가.

과정인가.

원본성인가.

이력인가.

관계인가.

 

그 세계가 계속 남아 있기를 바라는 마음인가.

 

개인은 결과를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사회는 과정이 사라지지 않도록 문을 열어두어야 한다.

 

과정의 가치는 강요로 보존되지 않는다.

다만 사람들이 그 과정에 반할 수 있도록, 입구는 열려 있어야 한다.

 

결과는 복제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길은, 누군가 계속 걸어야만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