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urine

stories & notes

IPCSALT 34

읽을 수 없는 플로피 디스크

— 존재하는 것과 접근 가능한 것은 다르다 창고 정리를 하다가 오래된 8인치 플로피 디스크를 발견했다. 까맣고 납작한 그것. 라벨에 무어라 적혀있다. 분명히 안에 뭔가가 들어있다. 하지만 이젠 그걸 열어볼 방법이 없다. 지금 컴퓨터엔 그걸 읽는 장치가 없다. CD조차 인식 못 하는 컴퓨터도 있다. 카세트테이프, VHS 비디오... 요즘 아이들은 그게 뭔지도 모른다. 사라진 건 아니다.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읽을 수 없다. 1. 존재한다는 것과 접근할 수 있다는 것 정보가 존재하는 것과 그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느냐는 서로 다른 이야기다. 마치 문자는 남았지만 해독법은 없는 옛 기록물처럼. 이스터섬의 롱고롱고 문자, 인더스 문명의 문자... 분명히 무언가를 기록한 것이다. 체계가 있고 반복되는 패턴이 있..

IPCSALT/IPCSALT 2026.06.06

존재하지만 접근할 수 없는: 잊혀진 것들

「스즈메의 문단속」 애니메이션 속 주인공 스즈메는 재앙을 일으키는 미미즈라는 존재를 봉인시키기 위해폐허가 된 장소들을 찾아다닌다. 버려진 리조트,산사태로 닫게 된 폐교.폐쇄된 놀이공원... 그 공간들은 사라진 게 아니다.여전히 거기 있다. 다만 사람이 떠나면서 길이 끊겼다.아무도 다니지 않으니 잡초가 덮였다.잡초가 덮이니 길이 보이지 않는다.더이상 찾아오는 이도 없다. 한때는 사람들의 온기와 소리가 가득했던 장소.여전히 어딘가에는 그곳으로 통하는 길이 있다.다만 그 길이 너무 오랫동안 사용되지 않아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잊혀졌다.1. 경로가 끊기는 방식 무언가가 사라지는 방식은 두 가지다. 실제로 없어지거나.아니면 접근하는 경로가 끊기거나. 이 둘은 서로 다르다. 폐교 안에는 여전히 칠판이 있고,복도가 있고..

IPCSALT/IPCSALT 2026.06.06

젊은 사람들은 왜 시골로 오지 않을까

— 지원금이 문제가 아니다 농촌에 정착하면 수천만 원을 준다.아이를 낳으면 한 명당 많은 지원금이 나온다.의료비 혜택도 있고, 빈 집을 저렴하게 구할 수도 있다. 숫자만 보면 충분히 매력적이다. 그럼에도 젊은 사람들은 오지 않는다.왜?1. 불편함의 목록 일단 불편하다. 병원 한 번 가려면 차로 한 시간이다.때문에 아이가 아프기라도 하면 보통 일이 아니다.배달 음식은 꿈도 못 꾼다.수도 하나 고장 나도, 형광등 하나 나가도모든 걸 내 손으로 직접 해결해야 한다. 그러나 이는 불편함의 일부일뿐.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2. 돈보다 비싼 것 시골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비용이 있다. 소속감을 얻는 비용이다. 10년을 살아도 타지 사람이라는 말을 듣는다.동네 사람 소리를 들으려면중고등학교를 같은 동네에서 나와야..

IPCSALT/IPCSALT 2026.06.06

사진 속의 나는 어디로 갔을까

— 기록이 존재하는 것과, 닿을 수 있다는 것은 다르다 아주 오래된 사진첩을 꺼내보았다. 분명히 내가 찍혀 있는 사진들이다.웃고 있는 나와,내가 아는 사람들과,전에 보았던 익숙한 풍경들. 어떤 사진은 이상할 정도로 생생하다.그날의 냄새가 떠오르고,공기의 온도가 떠오르고,잊었다고 생각했던 감정까지 되살아난다. 하지만 가만 생각해보면,그때의 나 자체가 돌아온 것은 아니다. 지금의 내가,남겨진 흔적을 따라그때를 다시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1. 기록과 접근은 다르다 우리는 종종 기억을 저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그래서 사진을 찍고,글을 쓰고,영상을 남긴다. 하지만 저장되는 것은 경험 자체가 아니다.경험이 지나간 자리의 흔적이다. 어릴 때 쓴 일기를 읽어 본다.문장은 이해된다.왜 화가 났는지도 알겠다.왜 슬펐는지..

IPCSALT/IPCSALT 2026.06.06

너무 잘 알아서 움직이지 못할 때 ㅡ 이해의 역설

— 이해의 역설 "나는 이미 늦었어." 점차 나이를 먹어가며.어느 날 문득 거울을 보면서. 혹은 오랜만에 만난 지인이생각보다 멀리 가있는 걸 보면서.1. 틀린 말이 아닐 수도 있다 솔직히, "이미 늦었어"가틀린 말이 아닐 때가 있다. 더 이른 나이에 시작했으면 지금쯤 달랐을 것이다.그때 그 선택을 했더라면 지금은 달리 살고 있을 것이다. 그 계산이 정확할 수 있다.냉정하게 봤을 때 맞는 말이다. 그런데 그 판단 때문에정확하게 알수록, 더 많이 알수록,더욱 움직이지 못한다.2. 지도가 너무 선명할 때 모르는 사람은 그냥 걷는다. 얼마나 멀리 있는지,얼마나 힘든지,중간에 뭐가 기다리는지. 모르니까 일단 출발한다. 그런데 다 아는 사람은 다르다. 저기까지 가려면 얼마나 걸리는지,지금 내 체력으로 가능한지,중간..

IPCSALT/IPCSALT 2026.06.05

아무것도 하기 싫은 것도 두 종류가 있다

ㅡ 멈춘 것과 꺼진 것은 다르다 "아무것도 하기 싫어." 무기력함.우울.누구나 한 번쯤 하는 말. 그런데 이 이면에는서로 다른 원인이 자리잡고 있을 수 있다.1. 같은 말, 다른 상태 창작을 하는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어떤 날은 하고 싶은데 못 한다.머릿속에 하고 싶은 말은 있다.뭔가 꺼내고 싶은 것도 있다.그런데 손이 안 간다.무언가 콱 막혀있다. 반면 어떤 날은 다르다.쓰고 싶다는 마음 자체가 없다.무언가를 꺼내고 싶다는 느낌도 없다.그냥, 모든 게 다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겉으로는 똑같이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그런데 안은 완전히 다르다. 첫 번째는 긴장이 살아있다.두 번째는 그 긴장 자체가 사라져 있다.2. 말을 안 하는 커플 여기 오래된 두 커플이 있다. 두 커플 다 요즘 말이 없다.서로 간에..

IPCSALT/IPCSALT 2026.06.05

알면서도 왜 못 바꿀까

알면서도 왜 못 바꿀까>ㅡ 지도와 지형의 차이 담배가 몸에 해롭다는 걸 모르는 흡연자는 없다. 폐암, 심혈관 질환, 수명 단축.담뱃갑에 써있고, 광고에 나오고, 의사가 말한다. 그럼에도 못 끊는다.왜? 의지가 없어서?건강이 소중하지 않아서?1. 지도와 지형 길을 바꾸는 방법은 두 가지다.지도를 바꾸거나,지형을 바꾸거나. 지도를 바꾸는 건 쉽다.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면 된다."담배는 해롭다"는 걸 아는 순간, 지도는 바뀐다. 그러나 지형은 다르다. 지형을 바꾸려면 에너지가 필요하다.시간이 필요하다.포크레인이 출동하든 폭약을 터뜨리든 큰 작업이 필요하다. 지도가 바뀌었다고 해서지형이 저절로 바뀌지 않는다. 흡연자가 담배의 해로움을 아는 순간지도는 업데이트된다. 하지만 몸은 그대로다.습관도 그대로다.뇌의 보상..

IPCSALT/IPCSALT 2026.06.05

성기훈은 왜 456억을 두고도 행복하지 못했나

— 돌아왔지만 돌아오지 못했다 오징어게임의 주인공 성기훈은 살아남았다. 456명 중 마지막까지 버텼다. 원하던 돈도 손에 쥐었다.그런데 게임이 끝난 후, 그는 그 돈을 거의 쓰지 못했다.통장에 456억이 있었지만 1년이 넘도록 허름한 고시원에 머물고,1만원조차도 떨며 빌려썼다. 어디로든 돌아가려 했지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돌아가려 했던 곳에 함께 기뻐해줄 사람이 남아있지 않았으니까.돌아가서 무엇을 해야 할지, 그 답을 찾지 못했으니까.1. 문이 열려 있다는 것과,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 우리는 종종 이 두 가지를 같은 것으로 생각한다. 나갈 수 있으면, 돌아갈 수 있다고.돌아가면, 그곳에 집도 있을 거라고. 하지만 문을 통과하는 것과통과한 후 돌아갈 곳이 남아있는 것은서로 다른 이야기다. RtR(..

IPCSALT/IPCSALT 2026.06.05

우리 사이, 어째서 점점 말이 안 통하는 걸까

—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긋나는 것이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어색했던 적이 있는지. 분명 좋아하는 사이인데.나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그냥, 어딘가 맞지 않는 느낌. 대화가 흘러가다 보면서로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대체 왜 그럴까.1. 정보가 멈춘 자리 가까운 사람일수록 우리는 상대를 "안다"고 생각한다. 좋아하는 음식, 싫어하는 상황, 웃음 포인트.한때 그걸 다 알고 있었다. 그런데 사람은 계속 변한다. 예전엔 사과를 좋아했지만 어떤 계기로 지금은 싫어한다.예전엔 조용한 걸 좋아했지만 지금은 사람이 그리워졌다.예전엔 그 주제로 웃었지만 지금은 그게 상처가 됐다. 그 변화를 모른 채 과거 버전으로 대하면 —"그게 언제적 얘기인데, 아직도 몰라?" 가까운 사이일수록 그 실..

IPCSALT/IPCSALT 2026.06.03

그들은 왜 나오지 못했나

— 사이비 종교와 탈출 비용 탈퇴자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밖에서 보면 이해 못 하죠. 근데 안에서는 나오는 게 불가능했어요." JMS, 신천지...대형 사이비 종교 사건이 보도될 때마다 비슷한 질문이 따라온다. 그렇게 당하고서도 왜 못 나오지?이용당하는 거 뻔히 알면서? 그러나, 그 질문에 "멍청해서"라고 답하는 순간,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된다.1. 누구든 빠질 수 있다 사람은 원래 외롭다.불안하고, 의미를 찾고 싶고, 어딘가에 소속되고 싶다.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은 마음, 이상한 게 아니다.인간이라면 당연히 가지는 것들이다. 취업에 실패했을 때, 사기를 당했을 때,오랫동안 혼자였을 때.그런 마음은 더욱 커진다. 그 틈을 사이비 종교는 정확하게 파고든다. 처음에 만나는 건 좋은 사..

IPCSALT/IPCSALT 2026.06.03

엄마는 왜 "적당히"라고 할까

ㅡ 정답이 없는 게 아니라, 정답이 움직이는 것이다 롤러코스터를 타러 갔다. 계속 내리막만 있으면 무섭기만 하고 재미없다.계속 똑같은 속도로 달리기만 하면 금방 지루해진다.올라갔다 내려갔다, 빨라졌다 느려졌다.그 변화 속에 재미있는 지점이 있다. 샤워할 때 물 온도도 그렇다.너무 뜨거우면 못 들어가고, 너무 차가우면 피한다.몸에 딱 맞는 온도가 있다. 음악도, 영화도, 대화도.너무 단순하면 지루하고, 너무 복잡하면 피곤하다.아무리 흥미로운 것도변화없이 지속되기만 하면 재미없다. 우리는 이걸 본능적으로 안다.그런데 그 "딱 맞는 지점"이 어디냐고 물으면 —대답하기 어렵다. 왜일까?1. 엄마의 "적당히" 요리를 배우려고 엄마한테 물어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이거 어떻게 해요?""적당히.""얼마나..

IPCSALT/IPCSALT 2026.06.02

의견 충돌이 사라졌는데 왜 망했을까

ㅡ 적당히 흔들려야 살아있는 것이다 역사를 보면 이상한 패턴이 반복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초기엔 신하들이 서로 티격태격한다.이 전략이 맞다, 저 전략이 맞다.왕 앞에서도 직언하고, 때로 격하게 다투기도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시기에 나라가 가장 강하다.영토도 넓어지고, 전쟁도 이기고, 내부도 돌아간다. 그러다 통일이 되거나 큰 적이 사라지고 나면.어느새 직언하던 충신들은 떠나거나 숙청당하고왕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는 간신배들만 남는다. 나라는 겉으로 조용하고 안정적으로 보인다.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 망한다. 갈등이 사라진 건데도어째서 도리어 무너진 걸까?1. 사인 곡선처럼 움직이는 것 수학 시간에 배운 사인 곡선을 떠올려보자. 위로 올라갔다가, 내려오고, 다시 올라가고.-1에서 +1 ..

IPCSALT/IPCSALT 2026.06.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