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는 순간이 아니다>
— 우리는 언제 무언가를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존 설(John Searle)이라는 철학자가 이런 사고실험을 했다.
방 안에 한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중국어를 전혀 모른다.
그러나 방 안에는 과거부터 현재까지, 역사상 존재했던
모든 중국어 기호와 그에 대응하는 규칙집이 있다.
이때 밖에서 중국어로 쪽지가 들어온다.
방 안에 있는 사람은 규칙집을 보고 적절한 기호를 찾아
중국어로 된 답장을 내보낸다.
밖에서 보면 완벽한 중국어 대화다.
그러나 우리는 묻는다.
방 안에 있는 사람은 중국어를 정말 "이해"한다고 할 수 있을까?
설은 이 사고 실험을 통해 말한다.
기계가 아무리 그럴듯하게 답해도
진짜로 이해하는 건 아니라고.
하지만 반대로 나는 묻는다.
특정 한 순간만을 보고
"이해"라는 것을 물을 수 있을까?
1. 아기는 처음부터 이해하지 못한다
아기가 언어를 배우는 과정을 본 적 있는지.
처음엔 그냥 소리다.
엄마가 "사과"라고 하면
아기는 그 소리를 따라 한다.
무슨 뜻인지 모른다.
그냥 따라 한다.
반복된다.
사과를 보여주면서 "사과"라고 하고,
또 보여주면서 "사과"라고 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아기가 빨갛고 동그란 것을 보고 스스로 말한다.
"사과."
그 순간이 언제 왔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어느 날 갑자기 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수없이 쌓인 반복 끝에 온 것이다.
처음 "사과"라고 따라 하던 순간,
그 아기는 이해하고 있었을까.
아니었을까.
2. 어른도 마찬가지
우리도 마찬가지다.
오랫동안 쓰던 단어들이 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아, 이게 그런 뜻이었어?"
그 단어를 수백 번 수천 번 썼는데
정작 그 의미를 정확히 몰랐던 것이다.
그렇다면 수없이 그 단어를 쓰는 동안
그 사람은 그 단어를 온전히
이해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3. AI도 버전마다 다르다
낮은 버전의 AI와 대화하면 티가 난다.
질문에 패턴을 맞춰 응답하는 느낌.
문맥을 놓치기도 하고,
엉뚱한 곳에서 엉뚱한 답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성능이 높아질수록 달라진다.
맥락을 읽고, 말의 결을 느끼고,
때로는 질문 뒤에 있는 것까지 짚는다.
그 차이는 어디서 오는 걸까.
더 많은 데이터.
더 많은 반복.
더 많은 경험.
그 경계가 정확히 어디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경계가
분명히 있다는 건 느껴진다.
4. 이해는 쌓이는 것
중국어 방 안의 그 사람.
그 안에서 1년을 보낸 사람과
10년을 보낸 사람이 같다 할 수 있을까?
어떤 쪽지에는 바깥에서 "하하하" 웃는 소리가 들리고,
어떤 쪽지에는 바깥에서 "화난 목소리"나 "우는 소리"가 들린다면?
처음엔 규칙집을 뒤적이며 기호를 찾았겠지만
시간이 지나고 경험이 쌓이면서
어떤 기호가 어떤 상황에 쓰이는지 감이 생기고,
어떤 답이 자연스럽고 어떤 답이 어색한지 느껴지기 시작할 것이다.
따라서 이해는 어느 한 순간에 오는 것이라 하기 어렵다.
켜지거나 꺼지는 스위치가 아닌,
조금씩, 조금씩, 쌓이다가
어느 순간, 거기 있는 것.
물론 시간만으로 이해가 저절로 생기는 것은 아니다.
같은 환경에 오래 있어도 끝까지 알려 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10년을 살아도 그 나라 언어를 못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1년을 살고도 유창해지는 사람이 있다.
차이는 노력의 양이 아니라,
그 언어가 자신에게 스며들 틈을 얼마나 열어두었느냐일 것이다.
반복은 씨앗을 심지만,
이해는 그 씨앗이 자랄 수 있는 틈이 있을 때
비로소 싹틀 수 있기 때문이다.
5.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설의 사고실험이 틀린 게 아닐 수 있다.
그 순간만 보면, 맞는 말일 수 있다.
그러나 이해를 순간의 스위치로 본다면,
우리 중 누구도 처음부터 무언가를
이해했다 할 수 없다.
아기도,
어른도,
AI도.
시작은 언제나 맹목적인 모방이자
단순한 규칙의 수행이었다.
그 순간이 언제인지
정확히 짚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해는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기적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궤적이 쌓여 만들어낸
단단한 지형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해란 원래 그런 것일지 모른다.
켜지는 순간이 아니라
쌓이는 과정.
지금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충분히 반복되고 경험되면
어느 날 알고 있게 되는 것.
그러니 혹 지금 당장 무언가를
잘 알지 못한다고 해서 멈출 필요는 없다.
웅얼거림이 언젠가 언어가 되고,
메마른 규칙집이 언젠가 삶의 맥락이 되듯,
묵묵히 축적되는 시간 속에서
언젠가 우리의 이해도
제자리를 찾아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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